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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팬덤 규모는 국내 기준으로도 수백만 명대를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저도 한때 "저 사람들은 왜 저러나" 싶었던 쪽이었는데, 15살 어느 날 우연히 들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이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덕질이 단순한 취미인지, 아니면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는 무언가인지 — 제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봤습니다.
입덕 계기 — 논리가 아니라 감각이 먼저였습니다
덕질을 시작하는 계기에 대해 "의도적으로 찾아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리를 걷다가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곡이 너무 제 취향이었고, 집에 돌아와 뮤직비디오를 틀었을 때 후킹 파트에서 갑자기 눈을 뗄 수 없는 멤버가 등장했습니다. 육성으로 "뭐야?" 소리가 먼저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여기서 후킹 파트(Hooking Part)란 뮤직비디오나 무대에서 시청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도록 설계된 특정 구간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이 부분에서 팬이 된다"는 포인트입니다. 저는 그 몇 초짜리 장면을 수십 번 돌려보면서 그 그룹의 다른 뮤직비디오까지 전부 파고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입덕 경로가 저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음악 심리학 연구에서도 특정 선율이나 시각적 자극이 감정적 각인(Emotional Imprinting)을 일으켜 특정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감정적 각인이란 어떤 자극이 강렬한 감정 반응을 동반할 때 그 대상이 기억 속에 강하게 새겨지는 현상입니다. 제가 뮤직비디오를 멈추지 못했던 게 그냥 우연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또 한 가지 — 저는 평생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콘서트 티켓에 몇십만 원을 쓰고, 포토카드를 몇만 원에 거래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돌은 내 존재도 모를 텐데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는 게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 생각이 180도 바뀌는 데는 그 짧은 뮤직비디오 한 편이면 충분했습니다.
심리 효과 — 덕질이 실제로 삶을 바꿨습니다
덕질의 심리적 효과에 대해 "그냥 기분 전환 정도 아닌가"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저는 덕질을 시작한 시기가 정확히 우울증이 심했던 때와 겹칩니다. 당시엔 제가 우울증인지도 몰랐어요. 좋아하던 그림도 손에서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왜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에 한 아이돌 그룹이 제 안으로 들어왔고, 제가 몰랐던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은 그룹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됐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SNS로 친해져서 실제로 만나게 됐습니다. 생일카페 스태프 일도 해보고, 직접 만든 굿즈를 나눔해보고, 그린 그림에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성적이던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정신건강의학 분야에서는 덕질에 해당하는 행동 패턴을 음악 치료(Music Therapy) 및 미술 치료(Art Therapy)의 연장선으로 보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음악 치료란 음악을 매개로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고 정서 회복을 돕는 치료적 접근을 말합니다. 자아가 약해졌을 때 외부의 강렬한 대상에 몰입함으로써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이 덕질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출처: WHO 정신건강 팩트시트).
콘서트 현장에서 최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감정은, 솔직히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정이었습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이 겉만 보고 판단하기엔 너무 아까운 경험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덕질이 심리적으로 작용하는 주요 메커니즘
- 몰입(Flow) 상태: 최애를 향한 집중이 일상의 불안과 잡념을 차단하는 효과
- 사회적 연결감: 팬덤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소속감과 유대감 형성
- 자기 효능감 회복: 굿즈 제작, 생일카페 운영 등 실질적인 성취 경험 축적
- 감정적 각인의 긍정적 전환: 강렬한 긍정 자극이 우울한 정서 패턴을 중단시키는 계기
올바른 덕질법 — "할 수 있는 만큼"이 가장 어렵습니다
덕질을 해본 사람에게 "해볼까요?" 물어보면 반응이 반반으로 갈립니다. 반대하는 쪽은 경제적 소모와 감정 소비가 너무 크다는 걸 이유로 듭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도 3년 동안 시간과 돈을 꽤 많이 썼습니다.
근데 감정 소비가 심한 이유를 짚어보면, 대부분의 팬들이 아이돌을 유사연애(Para-social Relationship) 감정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유사연애란 실제 관계가 아님에도 상대방에 대한 깊은 감정적 유대를 느끼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일방적인 애정 투자가 이루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최애의 열애설처럼 기대를 깨는 사건이 생기면 감정 충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유사사회적 관계 자료).
제가 직접 겪어보니 저는 이 부분에서 조금 달랐습니다. 최애를 연애 감정이 아니라 자식을 바라보는 것처럼 응원하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열애설이 터져도 삶이 무너지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팬들의 감정에 대한 직업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부주의하게 드러내는 것에 화가 납니다. 이건 직업정신의 문제라고 봅니다.
"자기 형편에 맞게,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하면 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근데 그게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해봤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하지 말라고는 못하겠습니다. 장점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제가 받은 긍정적인 영향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아이돌 덕질, 어른이 돼서 시작해도 늦지 않나요?
A. 저는 늦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봅니다. 입덕은 나이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감각적 각인이 일어나는 순간에 결정되거든요. 다만 사회생활과 병행해야 한다면 경제적 지출 범위를 미리 설정해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합니다.
Q. 덕질이 우울증이나 무기력감 해소에 실제로 도움이 되나요?
A. 제 경험상 도움이 됐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외부 대상에 대한 몰입이 음악 치료나 미술 치료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전문적인 치료를 대체한다고 볼 수는 없고, 보조적인 역할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Q. 최애 열애설에 상처받는 게 정상인가요?
A. 유사연애(Para-social Relationship) 구조를 이해하면 그 감정이 충분히 설명됩니다. 실제 관계가 아님에도 깊은 감정적 유대를 느끼는 현상이기 때문에 배신감이나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상처받는 자신을 탓하기보다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Q. 덕질 비용을 어떻게 관리하는 게 좋을까요?
A. 정답은 없지만, 제가 직접 써보니 월 고정 한도를 정해두는 방식이 가장 현실적이었습니다. 콘서트 티켓, 앨범, 포토카드처럼 지출 항목을 명확히 나눠두고 우선순위를 정하면 과소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덕질이 일상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시점이 관리가 필요한 신호입니다.
결론
지금은 그 그룹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지만, 그 시절 저를 구원해준 것이 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덕질이 단순한 취미냐, 아니면 삶에 영향을 주는 무언가냐는 결국 각자의 경험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후자였고, 그 3년이 지금의 저를 꽤 많이 만들었습니다.
"하지 말라"고도, "무조건 해보라"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이게 뭐야?" 싶은 순간이 온다면, 그냥 한 발만 들여놓아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 한 발이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